‹열하일기›나 ‹왕오천축국전›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두 여행기 모두 처음 의도와는 다른 길로 접어든다는 점입니다. 박지원의 애초 목적지는 북경이었고, 혜초도 지금의 인도인 천축국을 둘러보는 정도였겠지요. 그러나 모든 여행이 그렇듯, 기 ㄹ위에서 뜻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고, 그들의 여정은 바뀌고 맙니다.
여행과 글쓰기는 닮았습니다. 한 글자 한 글자가 모여 한 편의 긴 작품을 완성하듯 한 걸음 한 걸음 디뎌 오랜 여행을 시작하고 마치지요. 물론 여행을 떠나기 전에, 혹은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, 시간과 돈과 노력에 관한 예상을 하지만, 여행 혹은 글을 시작하고 어느 순간이 오면 그 예상을 뛰어넘게 됩니다. 순간순간 떨리고 순간순간 아득합니다.
반복을 혐오하고 최초를 지나치게 아끼는 예술가일수록 이 막막하고 먹먹한 날들에 이끌리지요. 그날들을 박지원처럼 평쳐보이느냐 혜초처럼 발바닥에 숨기느냐는 다음 문제입니다. 여행과 글쓰기가 각각 이러하다면, 여행하는 글쓰기 혹은 글 쓰는 여행은 더욱 부딪힘이 격렬하고 감정의 골도 깊을 겁니다.
도서관에 틀어박혀 이십 대와 삼십 대 초반을 보내고,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길 위를 걷고 있었으며, 여행에 매료된 이들의 삶을 쓰기 위해 여행 중이었습니다.
일본과 프랑스를 거쳐 조선 여인 최초로 아프리카 땅을 밟고 조선으로 되돌아와서 자살한 비운의 여인 리심과 실학자 박지원과 신라 밀교승 혜초를 쓴다는 핑계로 년 남짓 싸돌아다니다 보니, 작가란 떠돌 팔자란 변명을 하고 싶어, 이렇게 짧은 이야기를 하나 했습니다. 파묵의 말투를 흉내 내자면, 여행은 작가를 매혹시킴과 동시에 그 매혹의 변명이기 때문입니다.
- ‹천년 습작› 김탁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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